□ 국가보훈부(장관 박민식)는 “중일전쟁 이후 학생비밀결사를 결성하여 항일투쟁을 이어간, 서상교(1963년 독립장), 최낙철(1963년 독립장), 신기철(1990년 애족장) 선생을〈2023년 11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밝혔다.
□ 학생들은 1926년 6·10만세운동과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을 거치면서 민족운동의 주도세력으로 성장하였으며, 1930년대 전반기에도 각지에서 동맹휴학 등을 통하여 일제의 식민교육에 저항하였다.
○ 1937년 일제가 중일전쟁을 도발하면서 이른바 ‘전시체제(戰時體制)’는가 형성되자 조선에서는 대부분의 언론·집회·출판·결사가 금지되었으며, 일제의 감시와 탄압, 수탈이 더욱 강화되었다. 이 같은 경향은 1941년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 강화되었으며, 1943년 제4차 조선교육령의 반포로 민족교육은 더욱 위축되었다.
○ 그럼에도 학생독립운동의 불길은 꺼지지 않았다. 비록 동맹휴학은 줄어들고 적지 않은 학생운동단체가 사라졌지만 학생들은 비밀결사를 결성하여 항일투쟁을 이어갔으며 그 때문에 모진 시련을 겪기도 하였다. 당시 학생비밀결사로는 대구상업학교의 태극단(1942~1943), 대구사범학교의 연구회(1941), 춘천고등보통학교의 상록회(1939~1938)이 대표적이다. 서상교와 최낙철, 신기철은 학생비밀결사에서 활동하다가 옥고를 치른 인물들이다.
□ 1923년 11월 7일 경상북도 대구에서 태어난 서상교는 대구 남산소학교를 졸업하고 대구상업학교 5학년 재학 중이던 1942년 5월경 김상길·이상호와 함께 항일비밀결사 ‘태극단(太極團)’을 조직하였다.
○ 비밀리에 1년 정도 단원을 모은 이들은 1943년 4월경 의결기관인 간부회의(의장 1명, 부의장 2명, 서기관 2명) 및 일반조직과 특수조직으로 체제를 정비하였다. 단원은 모두 26명이었으며, 대구상업학교생이 24명, 경북중학교생과 대구직업학교생이 각각 1명이었다.
○ 이들은 5월 9일 비파산 약수터에서 약식으로 결단식을 치르고 민족의식 고취와 학술 연구, 체력 향상 등의 활동에 나서는 한편 전국적인 조직이 완성되면 국내외의 여론을 환기시키고 항일투쟁을 전개하며, 만약 어려울 경우 중국으로 망명하여 군사후원을 받는다는 등의 계획을 수립하였다. 아울러 군사학에도 관심을 갖고 관련 서적의 번역, 글라이더 및 폭발물 제조에 관한 연구도 추진하였다.
○ 그러나 결단식으로부터 불과 2주가 지난 5월 23일 누군가의 밀고로 단장 이상호가 대구경찰서 고등계 형사에게 체포되었으며, 그의 집에서 태극단 관련 문서가 발견되어 5월 25일 수업 중이던 서상교 등 9명, 5월 27일에 16명, 단원 26명이 모두 체포되면서 본격적인 활동에 착수하지 못한 채 태극단은 와해되었다.
○ 서상교 등 9명은 10월 11일 대구형무소로 이감되어 이들 중 3명은 10월 중순 검사의 기소유예로 출감하였고, 1944년 1월 19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서상교는 “일본제국의 국시[國是]를 반역한 국적[國賊]”이라고 분개하는 판사로부터, 검사가 구형한 단기 4년 이상 장기 7년보다 높은 단기 5년 이상 장기 7년의 실형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같은 해 4월 인천소년형무소로 이감된 그는 1945년 해방을 맞아 8월 16일 출옥하였다.
□ 1921년 11월 22일 전라북도 무주에서 태어난 최낙철은 대구사범학교 5학년에 재학 중이던 1941년 1월 임병찬 등과 함께 항일비밀결사 ‘연구회(硏究會)’를 조직하였다. 이들은 조선이 가까운 장래에 반드시 독립할 것이며, 이에 대비하여 각자가 관심 있는 학문을 연구하여 실력을 양성하고 각 방면에서 최고의 지도자가 되는 것을 노력하기로 결의하였다.
○ 회원은 모두 5학년생이었으며, 1월부터 3월까지 사범학교의 교과목을 중심으로 교육부·문학부·이과부·지리부·수학부·역사부·농업부·공업부·종교부·전기과학부·문예부·물리부·정치경제부·음악부 등 14부를 편성하였는데 최낙철은 지리부 책임을 맡았다.
○ 회원들은 1941년 2월부터 3월까지 6회의 모임을 갖고 연구결과를 발표하며 민족의식을 고취하였으며, 졸업 후 교사로 부임하면 일제의 패망과 조선의 독립에 대비하여 우수한 조선인 학생에게 이른바 ‘천재교육’을 시행하여 민족의 지도자로 양성하며, 현지에서의 활동을 매월 1회 보고한다는 계획도 수립하였다.
○ 회원들이 모두 졸업을 앞둔 5학년생이어서 더 이상의 활동이 곤란하게 되었다. 이에 임병찬과 장세파는 4학년생 유홍수 등으로 하여금 1940년 11월 박효준의 주도로 결성되었던 비밀결사인 대구사범학교 문예부와 연구회를 통합하여 1941년 2월 다혁당(茶革黨)을 조직하여 학생운동을 지속하도록 지도하였다.
○ 다혁당의 주요 활동은 한글로 된 조선 역사와 문화 관련 서적을 윤독하여 독후감을 발표하고, 방학에는 귀향하여 야학을 개설하고 문맹을 퇴치하며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 독립전쟁에 대비하여 체력단련하고 군사훈련을 실시하는 것 등이었다.
○ 1941년 3월 졸업 후 함경북도 나진의 약초공립국민학교에 부임하여 연구회의 활동을 수행하던 최낙철은 같은 해 7월 대구사범학교의 학생비밀결사가 적발되면서 체포되었다.
○ 충청남도 홍성에서 교사로 근무하던 정현이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다가 경찰에 체포되었으며 가택수색 과정에서 민족적 내용을 담은 문예지 '반딧불'이 발각되었고, 대구사범학교 졸업생과 교직원, 학부형 등 300여명이 체포되었다.
○ 최낙철은 1943년 11월 30일 대전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5년의 실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아 출옥하였다.
□ 1922년 1월 24일 강원도 춘천에서 태어난 신기철은 춘천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춘천고등보통학교에 재학 중 항일비밀결사인 ‘상록회(常綠會)’에 가입하였다. 상록회는 1937년 3월경 춘천고보 남궁대 등이 조선의 독립을 준비할 목적으로 결성하였다. 이들은 1937년 4월 “조선 민족의 해방을 목적으로 하고, 참된 조선인의 양성과 회원의 단결심의 양성 훈련”을 위하여 별도의 독서회를 조직하고 농촌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 간부급 회원들의 졸업을 앞두고 1938년 2월경 이연호를 중심으로 새로운 임원진이 구성되었다. 이때 신기철은 남궁대의 지시를 받은 이연호의 권유로 입회하여 서적계 책임을 맡게 되었으며 이후 동료들을 입회시켰다. 같은 해 5월 일본으로 수학여행을 다녀온 회원들은 6월 감상간담회를 열고 조선인의 무자각에 대하여 설명하며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 같은 해 10월 신기철은 회장 겸 서적계 책임을 맡게 되었으며, 기독교 예배당에 모여 학교에서의 일본인과 조선인 차별대우 및 농촌문제에 대한 당국의 시정에 대한 협의를 주도하였다.
○ 1938년 가을 상록회가 경찰에 적발되면서 각지의 졸업생을 포함한 137명이 체포되고 이들 중 36명이 검찰에 송치되었다. 이들 중 신기철 등 12명은 1939년 12월 2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 6월의 실형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 1930년대 중반 이후 침체의 늪에 빠졌던 학생독립운동은 1940년대에 들어와 오히려 활기를 띠게 되었다. 태평양전쟁을 발발한 일제가 점차 수세에 몰리게 되자 일제의 패망과 조선의 독립에 대한 희망이 보였으며, 일제의 탄압과 수탈이 강화될수록 그에 대한 반발도 심화되었다.
□ 이 시기에는 1930년대에 비하여 이른바 ‘민족주의계열’의 학생비밀결사가 증가하였는데, 서상교·최낙철·신기철이 입회하였던 태극단·연구회·상록회가 모두 그러하였다. 하지만 대부분의 학생비밀결사가 경찰에 적발되어 그 회원들은 모진 고문을 받고 옥고를 치렀으며 그 과정에서 많은 학생들이 순국하기도 하였다.
□ 민족의 암흑기와 같았던 전시체제기에 학생들은 독립운동의 불씨를 꺼트리지 않기 위하여 자신의 장래와 안위를 돌보지 않고 헌신하였다. 그 덕분에 한국독립운동의 숭고한 정신과 역사는 끊어지지 않고 계승될 수 있었다. 칠흑같이 어두웠던 시기에도 꺼지지 않았던 불씨였기에 학생들의 값진 노고와 희생은 우리 역사에서 더욱 환하게 빛나고 있다.
□ 정부에서는 선생들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서상교, 최낙철 선생에게는 1963년 독립장, 신기철 선생에게는 1977년 대통령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