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재룡 [1884~1955] 독립장 서훈년도: 1963년
선생은 1884년 1월 3일 경상남도 창녕에서 단양우씨 채희와 진주강씨의 6남매 중 외아들로 태어나 일곱 살 되던 해에 글공부를 시작했으나 문인적 소양보다는 무인적 성향이 강했는데 이는 부친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1902년 대한제국 군인으로 대구 진위대에 입대하여 군대해산이 이루어지는 1907년까지
5년간 근무 하던 중 정용기 산남의진 의병장을 만나 큰 감화를 받아 민족운동에 투신하게 되었다.
선생은 대구 진위대에 근무하던 중 군대가 해산되자 청송의 "산남의진"을 찾아가 의병전쟁에 참여하여 연습장이라는 중책을 맡아 병사들을 훈련시켜 의진의 전투력을 향상시키는데 기여하였고 일본군과의 20여 차례 전투를 벌이며 서울 진공작전을 추진하였으나 체포되어 1908년 9월 14일 대구지방재판소에서 소위 ‘내란죄’로 ‘종신유형’ 처분을 받았으나 합방특사로 풀려나게 된다.
1915년 7월 15일(음), 박상진과 함께 대구에서 ‘광복회’ 결성에 참여하여 비밀ㆍ폭동ㆍ암살ㆍ명령의 4대 행동강령을 두고 군대식으로 만든 광복회 지부와 연락기관 및 독립군 양성을 위한 사령부로서 ‘길림광복회’를 설치하고, 군자금 모집 및 친일파 처단을 통해 친일세력들에게 경각심을 불러 일으켰다.
1919년 9월에는 군자금 7천여원을 임시정부에 전달하고 임시정부와 힘을 합쳐 1920년 1월 광복단결사대(조선독립군사령부) 조직에 착수, 1920년 6월 "주비단"을 조직하여 활동 중 임시정부의 ‘임시군사주비단’ 사건으로 1922년 4월 1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 받고 1937년까지 무려 16년간의 긴 옥고를 치렀다.
해방 후 일제강점기 뜻을 같이 했던 독립운동가들을 모아 "광복회"를 재건하고, 활동을 계속하다 1955년 3월 3일(음) 대구에서 서거하셨다.
<주요어록>
우리나라 천년의 종사(宗社)는 회진(灰塵)되고 우리 2천년의 민족은 노예가 되어 섬 오랑캐의 악정폭행은 날로 증가하니 이를 생각하노라면 피눈물이 솟고 조국을 회복하고자 하는 마음을 금할 수 없다. 이것이 본회가 성립된 이유이니, 각 동포는 그 지닌 바 능력을 다해 이것을 돕고 앞날 본회의 의기(義旗)가 동쪽에 오를 것을 기대하라. 그리고 각 자산가는 자금을 미리 준비하여 본회의 요구에 응하여 출금(出金)하기 바란다. 만일 우리 회의 기밀을 누설하거나 그 요구에 불응 할 때는 본회에는 자체 정규(定規)가 있어 이에 따라 조처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