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은 대한제국 시기 정치가, 외교관이자 애국지사였다.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무관으로 이름났던 이경하(李景夏, 1811-1891)의 아들로 1852년 음력 9월 3일 태어났다. 부친 이경하는 1863년 고종이 즉위하고 대원군이 집권하자 훈련대장, 금위대장, 형조판서, 한성부판윤 등을 역임하면서 대원군의 깊은 신임을 받고 군사, 경찰권을 장악했던 권세가였다.
선생은 일제의 국권침탈이 자행되던 1900년대에 대한제국을 대표하는 전문 외교관으로 활약한 분이다. 이러한 선생이 처음 벼슬길에 나가게 되는 것은 26세 때인 1878년에 직부전시(直赴殿試) 자격으로 식년시 병과에 급제하면서부터이다. 외교관으로 출국하기 이전 선생은 공조, 호조, 이조, 형조 등 각조 참판, 그리고 궁내부대신, 법부대신, 고등재판소재판장 등 요로의 중직을 두루 거쳤다. 뿐만 아니라 성천, 순천, 영변 등지의 부사를 맡아 간간이 외직으로 나가기도 했다
1895년 민왕후가 친로정책을 표방할 때 친로파에 가담하여 농상공부협판으로 대신서리가 되었으나 민왕후가 시해되는 을미사변 후에 사임하였다. 뒤이어 춘생문사건(春生門事件)의 주역이 되었다가 거사가 실패하자 일시 망명하기도 했다.
이듬해 초에 귀국한 선생은 1896년 2월 아관파천 때 그 주역으로 참여하였다. 국왕을 사지에서 벗어나게 하고, 일제의 국권 침탈로 절체절명의 위기에 내몰린 국가의 운명을 가까스로 되살리려는 충정의 발로였던 셈이다. 그 결과 김홍집(金弘集) 친일내각을 몰아내고 선생은 새 내각의 법부대신 겸 경무사가 되었다. 그리하여 선생은 아관파천 이후 한동안, 일제가 저지른 을미사변에 대한 수사를 담당하게 되었다. 선생은 수사를 철저히 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 사건 가담자는 사실상 일본의 군인과 경찰, 낭인배 등이었고, 그 배후에는 주한 일본공사와 일제 당국이 있었다. 객관적 정세로 보아 일제측 관련자를 전원 소환하여 수사할 만한 상황이 되지 못하였다. 이 사건을 의욕적으로 수사하려던 선생이 오히려 얼마 뒤 주미공사로 전임됨으로써 정치적으로 불리한 입장에 몰리게 된 것이다.
선생은 1896년 주미공사가 되어 기울어져가던 대한제국의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구국외교에 투신하였다. 1896년 6월 20일 주차미국특명전권공사에 임명되어 7월 고국을 떠나 9월 워싱턴에 도착하게 된다. 미국에 도착하기까지의 그동안 여정을 보면, 선생은 부인, 아들 이위종, 통역관 등과 함께 7월 16일 프랑스군함 베이아르(bayard)호를 타고 중국 지부에 도착하였으며, 이곳에서 중국 선박인 연승호(連陞號)로 갈아타고 상해와 샌프란시스코를 경유한 뒤 9월 9일 워싱턴에 도착하였던 것이다. 이후 선생은 다시는 고국땅을 밟지 못하고 비극적 운명을 맞게 된다.
1896년 선생은 주러시아 공사로 전임되어 프랑스, 오스트리아까지 3개국 주재공사를 겸임하였다. 하지만, 선생이 미국을 떠나는 것은 1900년 3월 중순경이었던 것 같다. 그러므로 미국에 체류한 기간은 3년 반 정도 되는 셈이다.
선생이 런던을 경유하여 파리에 도착한 것은 1900년 5월 4일이었다. 이때 이기종, 이위종 두 아들과 함께 도착하였다. 한 달 정도 파리에 머문 선생은 6월 12일 프랑스 대통령 에밀 루베( emile loubet, 재임기간 1899-1906)를 접견하였다. 이후 겸임지인 오스트리아 비엔나를 거쳐 러시아 생 페테르스부르크에 도착한 선생은 7월 12일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aleksandrovich nikolai ii, 재위기간 1894-1917)에게 신임장을 전달하였다. 7월 13일자 러시아 신문에는 그 사실이 다음과 같이 소개되어 있다.
7월 12일 금요일, 러시아 황제는 빼쩨르고프 궁전에서 이범진 주러 대한제국공사의 신임장을 재차 수락하였고, 이범진 공사는 자신의 신임장을 황제에게 전달하는 영광을 안았으며, 그날 이범진은 알렉산드라 표도르브나 러시아 왕비에게 소개되는 영예도 안게 되었다.
즉 선생은 생 페테르스부르크 교외에 있는 빼쩨르고프 궁전에서 러시아 황제를 만나 신임장을 전달했으며, 그 자리에는 왕비도 배석했던 사실을 알려준다. 선생이 러시아 황제를 알현했던 빼쩨르코프 궁전은 오늘날 여름궁전으로 불리는 유명한 관광명소이기도 하다.
이후 생 페테르스부르크에 주재하던 선생은 일시 영국으로 건너가 대한제국 대표로 1901년 2월에 거행된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queen victoria, 1837-1901) 장례식에 참석하기도 하였다.
선생은 1901년 3월 12일 그동안 겸임해 오던 프랑스, 오스트리아 공사직에서 해임되고 주차아국특명전권공사(駐箚俄國特命全權公使), 곧 주러공사 직에만 임명되었다. 그리하여 7월 10일 프랑스 루베 대통령에게 소환장을 제출하고 루베 부인까지 접견한 뒤 생 페테르스부르크를 향해 출발하였다. 선생은 그뒤 1904년 2월 4일 독일 주재 공사에 일시 임명되었지만, 같은 달 20일 주러공사에 복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