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기섭 [1887~1959] 대통령장 서훈년도: 1989년
선생은 1887년 4월 4일 경기도 파주의 해평 윤씨 명문가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강원도 철원의 문장가 박초양 선생의 문하에서 공부하고 서울 보성학교를 제1회로 입학하여 1909년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이후 평북 정주의 오산학교 교사로 부임하여 민족교육에 종사하였고, 신민회에 가입하여 애국계몽운동에 투신하였다.
1911년 선생은‘안명근사건’과‘105인사건 으로 이승훈 등이 구속되어 옥고를 치르면서 오산학교가 어려운 지경에 처하게 되자, 1911년 8월, 서간도 유하현 삼원포로 망명하여 이시영, 이동녕 등과
함께 한인 자치기관 ‘경학사’를 설립하고, 산하에‘신흥무관학교"
를 창립하여 10년간 학감 및 교장을 역임하면서 수많은 군사 인재를 양성하였다.
1920년 2월 말 임시의정원 서간도 의원으로 상해에 도착한 선생은, 독립전쟁 뿐만 아니라 외교활동에도 관심을 기울여 1921년 11월 태평양회의에 참석하는 각국의 대표들에게 독립청원서를 발송하였다. 1926년 12월부터 1935년까지 임시정부 국무원으로 선임되어 군무장 등으로 활약한 선생은 독립운동정당 통합운동에도 적극적으로 뛰어들어 1935년 남경에서 민족혁명당 창당의 결실을 맺고, 당보부 책임자로 활동하였다.
1943년 3월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군무부 차장에 임명되어 독립운동을 계속하던 선생은, 해방 후 환국하여 민주주의민족전선, 민족혁명당, 민족자주연맹 등에서 활동하였고 1950년 5월 30일 대한민국 제2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지만 한국전쟁 당시 다른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납북되어 1959년 2월 27일 향년 73세로 서거하였다.
1989년 대한민국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건국훈장 대통령장에 추서하였다.
<주요어록>
“금년 내로는 반드시 전투를 개시하되 먼저 적에게라도 성명하야 우리는 우리의 가능한 힘으로 나아가니 너희는 너희 힘대로 오너라 하여 사력을 다 할 것이요 ...... 우리가 비참한 전투를 한 뒤에야 세계가 움직이겠고, 우리가 비참한 전투를 당한 후에야 국민의 단합이 완성되리라” (1920년 3월 선생이 임시의정원에서 독립혈전을 주장하는‘군사에 관한 건의안’을 제출하면서 했던 연설의 일부분, 독립신문, 1920년 4월 3일자)